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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

한국 천문학의 역사

천문학은 어떻게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을까.

 

자연과학 중 가장 오래된 학문으로 천문학을 꼽는데... 천문학이 오랜 옛날 고대에는 생존과 직결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컨데 시리우스가 해뜨기 직전에 나타나면 나일강이 범람하는 계절이라는 것을 알게 된 고대 이집트가 있고, 북두칠성이 인간의 죽음과 관련있다고 믿는 중국인들도 있었다.

 

아일랜드에 있는 뉴그레인지 (Newgrange)  신석기 무덤

 

아일랜드에 있는 뉴그레인지(Newgrange) 신석기 무덤이나 한국에서 발견되는 고인돌, 마야 문명의 천문대 등을 보면 오래전부터 천문학이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당시 천문학은 천체의 규칙적인 운동을 파악하는 것이 전부였지만 규칙적인 활동을 알아야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이용해 시간을 표기할 수 있었고, 농사는 물론 수렵이나 겨울을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런 만큼 천문학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생존 요소가 되었다.

 

StoneHenge

 

영국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스톤헨지'도 거대한 달력이었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3천 년도 더 된 옛날 일이지만 현재 우리 생활 속에 깊이 녹아 들어와 있다. 달력도 고대 천문학이 틀을 잡아놓은 것이고, 오늘날 곧잘 즐겨 사용하는 '오늘의 운세'도 고대 천문학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별자리들도 메소포타미아의 목동들이 만들어 놓은 산물이다.

 

1978년 발견되 충북 청원군 아득이 고인돌.

 

동양에서는 청동기 시대부터 별을 관측하였다고 한다.

고인돌에 새겨진 별자리 모양이나 고분 벽화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경남 의령군의 고인돌이나 평남 증산군 고인돌 등으로 봤을 때 기원전 25백년 경에서부터 이런 흔적들이 발견된다. 다만 시대가 시대다보니 문헌적인 기록은 전무한 상태여서 어느 정도의 전문성을 가지고 연구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가장 오래된 동양의 천문대 - 첨성대

 

삼국사기를 보면 기원 원년 경의 일식 현상도 기록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일본에 역박사와 천문박사를 보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 것으로 볼 때 천문학이 상당 수준 발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천문학은 고려사나 각종 고분들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세종대왕 시대에 이르러 천문학은 절정에 맞이하게 된다. 관상감을 설치하여 역법 제작, 천문기기 제작, 서적 발행 등을 맡게 하였다. 이때 나온 책이 칠정산과 천문유초. 조선 시기에도 과거 제도에서 음양과를 통해 천문학 관련 기술관을 뽑았을 정도로 조선 역시 천문학을 매우 중시했다.

 

그런데 문제는 명나라였다. 명나라는 오직 황제만이 천문을 다룰 수 있었으며 황제의 허락없이 한다는 것은 사형에 가까웠다. 이러한 국제 정세속에서 세종대왕은 몰래 천문학을 공부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는 서양 문물들과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현종 때 만들어진 혼천시계나 영조 때 만들어진 황도남북양총성도가 대표적이다. 조선 후기의 학자 김영은 서양의 역법을 도입해 신법중성기를, 조선의 역법을 정리해 국조역상고를 썼다.

실학이 발전하면서 조선의 천문학도 발전을 이뤘다.

 

 

한국의 천문학은 일제시대 암흑기를 거쳐 광복 이후 다시 발전을 시작했다.

 

1948년도에 서울대학교 천문기상학과가 개설되며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었고, 1967년도에는 연세대에 천문기상학과, 1985년에 경희대에 우주과학과, 이후 80년대 후반에는 충남대, 충북대 등에서 천문 관련 학과를 개설하였다.

 

 

 

 

사람이 검소하지 않으면 욕망이 많아 담백하지 않게 되고, 결국 뜻을 밝혀낼 수 없을 것이다.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야 학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 제갈량